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릴레오 갈릴레이 (문단 편집) == 생애 ==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의 몰락 귀족인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1520~1591)는 의류 교역업자이자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는데[* 이 사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피렌체의 예술가 모임인 '''카메라타'''(camerata)는 [[오페라]]가 탄생한 모임으로 유명하다.],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종종 지적 권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런 성격은 아들 갈릴레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갈릴레오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그가 태어났던 때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갈릴레오는 10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했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갈릴레오가 보수가 많은 직업인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의학보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4학년 때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1585년 피렌체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갈릴레오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냈고 결국 피사의 모교에서 수학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대신 보수는 형편없었다.[* 당시 의학 교수는 1년에 2,000 스쿠디를 받았지만, 갈릴레오는 60 스쿠디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대학에서 수학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피사 대학에서의 교수 계약이 끝나자, 갈릴레오는 다시 심각한 재정 곤란에 빠졌다. 159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그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할 경제적 책임이 주어졌다. 여동생들이 결혼하여 출가하자, 갈릴레오는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서 혼수를 준비해줘야 했다. 1592년 갈릴레오는 [[파도바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년 동안 재직하며 기하학, 천문학, 군사기술 등을 가르치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들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그의 경제적 궁핍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해 유럽 전역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개인 지도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피렌체의 지도자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아들인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코시모 데 메디치]]도 있었다. 1609년 갈릴레오는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했고,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을 가지고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인류 최초로 [[갈릴레이 위성|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다. >목성의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다시 그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거부하고 우주의 이러한 체계마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울 수있는 강력하면서 우아한 주장을 갖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눈앞에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목성의 주위를 배회하는, 그리고 그들 모두 12년의 공간을 태양 주위로 대회전하는 궤적을 밟는 4개의 별이 펼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 -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 中 이 발견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쉈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과 그 밖의 발견들을 책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쉽게 구성되었고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에[* 당시의 교양 서적은 전부 [[라틴어]]로 쓰였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무려 550쇄까지 인쇄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토스카나 대공국]]의 제4대 대공인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헌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메디치 성'이라고 명명했다.[* 아예 이 네 위성에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와 그 남동생들의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한다. 물론 지금은 현재 사람들이 아는 [[가니메데(위성)|가니메데]], [[칼리스토(위성)|칼리스토]], [[이오(위성)|이오]], [[유로파(위성)|유로파]]로 바뀌었지만.]이는 토스카나의 메디치 궁정의 막강한 후원을 얻기 위한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면서, 드디어 갈릴레오는 진저리나는 대학 체제에서 벗어나 엄청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손에 쥐게 되었다. 1611년,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했다. [[교황청]]은 이 저명한 학자를 환영했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했다. 교황을 접견하는 이는 누구라도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교황은 그 전통을 깨고 갈릴레오를 무릎 꿇게 하지 않았다. 당시 교황청의 주도 세력이었던 [[예수회]] 또한 갈릴레오의 주장을 지지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곳에서 강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세력도 당연히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었다. 개중에 토마소 카치니라는 [[도미니코회]]의 [[수도자]]는 종교재판소에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종교재판소는 조사에 착수했지만 카치니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결한 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갈릴레오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갈릴레오도 이런 분위기를 알았다.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철학자들을 피상적이며 불성실한 종교적 열성을 가진 천박하고 저속한 저자로 공격했다. 토마소 카치니가 갈릴레오를 공격하고 1년 뒤,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향했다. 자신을 방어하고,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개인적으로 로마 당국에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 당시 로마의 분위기가 갈릴레오의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해 [[교황청]]은 '새로운 것'에 민감한 상태였고, 갈릴레오의 주장이 물리학과 수학의 한계를 넘어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든다고 여겨 그를 만나기를 꺼렸다. 갈릴레오는 침묵하지 않고 이곳 저곳에서 논쟁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교황청]]은 모든 《성경》해석에,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교황청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에 매우 민감했다. 개인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개신교]]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성경》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일치할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은 교황청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벨라르민 [[추기경]]은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권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만두었다. 1613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라는 저서를 냈는데 이후 그 내용을 높게 평가하지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만은 《성경》에 반하므로 믿을 수 없다는 이의를 피사 대학으로부터 받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성경》에는 거짓이 없으며 《성경》은 잘못될 수 없습니다.[* 이 때까지 이렇게 알고 있었으나, 2018년 새로운 편지의 발견으로 갈릴레오가 직접 《성경》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세한 것은 아래 관련 문단 참조.] 단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간혹 잘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며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편지 때문에 성직자들이 그를 적으로 여기고 종교재판소에 회부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 눈이 벌개졌으며, 재판소에서도 편지를 조사했지만 무혐의로 판정했다. 그러고 나서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성경》에 반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재판소에 고발이 들어갔고, 재판소는 1616년 2월 24일 해당 도서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판결문에 피고인과 도서의 이름을 적지 않고''' 대신 스스로 조심하라는 경고장을 갈릴레오에게 보냈다. 갈릴레오는 수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공공연히 가르치고 옹호하는 것을 자제했다. 이윽고 1624년 봄, 새로운 교황인 [[우르바노 8세]]의 즉위 축하식에 참여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출발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전부터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였다. 새 교황과 갈릴레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갈릴레오가 환대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메달 2개와 그림, 그리고 아들 빈첸초를 위한 교회 장려금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교황으로부터 받고 로마를 떠났다. 《천문 대화》를 저술했으나[* 서적 검사 관리이던 제자가 초본의 내용을 보고 너무 위험하다면서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고, 제자와 갈릴레오를 지지하는 성직자가 상당 부분을 고친 끝에 겨우 낼 수 있었다.] 6개월 만에 발행을 금지당했고 끝내 1632년 9월 23일,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편지가 왔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의 망명도 고려했으나 결국 출석을 결심하고 1633년 2월 로마에 도착, 최종 판결을 6월에 받았다. 그는 혐의를 인정하면서 그때껏 연구한 것과 정반대로 지동설을 비난했고, 교황청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해 감금령을 내렸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종교재판소에서 특별히 의자를 마련해 앉아서 재판을 받게 해 줄 정도였다.] 곧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 금고형으로 3년을 지냈는데, 한 번은 위에서 언급된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후에 시에나 대주교의 자택에서 손님으로 지내다가 다음엔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라는 작은 시골에서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평온하게 연구에 전념하며 살았다. 늘그막에는 노환으로 실명이 되었는데 1642년 1월 8일, 찾아온 두 제자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때 제자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지 않나 하여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숨을 거둬서, 제자들과 나누던 평범한 대화가 유언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토스카나 대공은 갈릴레오를 기리기 위해 산타크로체 성당 본당에 묻고 성대한 기념비를 세워주려 했지만,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평범한 시민으로 부속 성당에 묻을 것이며, 아무런 허례나 예식을 갖추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 [[교황청]]이 아예 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의 죽음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촐한 장례식을 치르게 강요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